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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학도병의 붉은 피로 지킨 나의 조국, 대한민국"…고 원서 배양태 박사를 추모하며

기사승인 19-09-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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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전쟁 당시 군번없이 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죽어간 학도병들의 영웅적 행동을 스크린에 담은 '장사리:잊혀진 영웅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곽경택, 김태훈 감독, 김명민 주연의 '장사리'는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북한군 주둔지였던 장사리에 학도병들이 상륙작전을 펼쳐, 장비와 화력등의 열세에도 불구 임무를 완수 했지만 결국 모두 국가를 위해 산화했다는 뭉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전투에 의한 사망자는 15만 명, 행방불명은 20만 명, 부상자가 25만 명이다.
 
전쟁에 참여한 한국군 학도병 숫자는 30만 명으로 그 중 5만여 명은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보상이나 예우는 미흡한 실정이다.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학도의용병들은 당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전투에 배치되어 용감히 싸웠다.
 
한국전쟁으로 화를 입은 사람은 수백만에 이르고 북한 공산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애국자를 넘어 영웅적이었던 그들의 삶이 다시 조명되는 가운데 경기북부 양주시에 거주하는 배용석(49)씨의 선친인 고 원서 배양태 박사의 영화 같은 일대기가 알려지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배 박사의 가족들은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엮어 출판했으며 오는 9월 26일 서울에서 출판기념식을 진행한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익활동을 주도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병들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에 진학, 이후 평생을 의료인으로 봉사, 헌신하는 애국자의 삶을 살았던 고 배양태 박사의 역경 스토리를 발굴, 취재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그는 아직 그 흔한 훈장 서훈이나 국가유공자에 추서되지 못했다.
 
이번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업적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발굴되어 이에 합당한 보상과 예우가 주어지기를 국민 개인의 입장에서 기대해 본다.
 
대한민국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나갔던 고 배양태 박사의 라이프 스토리를 통해 풍족한 삶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매몰된 요즘 청년 세대 그리고 부모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집필했음을 알려둔다.
 
또한 이 기사는 배양태 박사의 미망인 미랑 이수정 시인이 보관하던 자료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장영식 전 한국전력사장의 회고 등을 취합해 작성되었다.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기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진위 여부는 가족들의 증언에 따른 것임을 밝혀둔다.
<편집자주>


<고 원서 배양태 박사>

일제 해방 후 신탁통치를 놓고 벌어진 좌우의 극한 대립 속 중학생 배양태
 
일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 말 대한민국은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한국을 미, 영, 중, 소의 4개국에서 최고 5년간 신탁통치하겠다고 결정한다.
그러나, 이 안은 격렬한 국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 결정 초기에는 공산당도 반탁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뒤에는 찬탁으로 그 태도를 바꾸었고, 이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큰 난관에 봉착한다.
 
전남 광주 지역 또한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었다.
 
광주 서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배양태 박사는 친구 장영식씨와 민주진영에서 활동, 뜻을 같이 하는 서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당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진 학생들이 거리에서 피투성이가 될때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시대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험한 날들이었다.
 
특히 광주의 경우 일제하에서 국내 공산당을 조직했던 박헌영이 일제말기 광주에 있는 벽돌공장에 은신하면서 그의 비밀조직이 신속하게 움직이던 지역이다.
 
광주서중 학생들중 공산주의에 심취한 학생들은 이미 조선공산청년동맹에 소속되어 이론적으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친일반동교사 물러가라.’, ‘노동자, 농민 해방하라.’ 등 수많은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화랑단'을 조직해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학내에서 위기를 느꼈던 배양태와 그의 친구 장영식 등은 반대 세력을 모아 '광주애국학도동지회' 를 결성했다.
 
'광주애국학도동지회'는 숫자가 적었지만 단단한 결속력으로 공산주의 학생에 대항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서중학생회를 공산주의 학생들이 장악하게된다.
 
이들은 소위 ‘반동교사 축출’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동맹휴학을 일삼는 동시에 ‘애국학도동지회’에 동조하는 40여명의 학생을 일방적으로 퇴교시켰다.
 
배양태와 뜻을 함께한 학생들은 일방적 조치에 불복하고 등교를 강행하는 등 투쟁했다.
 
이런 노력덕분에 ‘애국학도 동지회’가 광주지역에서 태동된 최초의 민족진영 학생단체로 자리매김한다.
 
이 단체는 1946년초 발족한 ‘반탁학련 광주지부’를 구성하는 모체가 된다.
 
‘반탁학련 광주지부'는 그 해 2월 26일 광주중앙국민학교 강당에서 시내학교 남녀학생 800여명이 모여 결성했다.
 
광주학련은 반탁학련의 지방조직으로는 최초였다.
 
발족부터 참가하여 해산 때까지 열정적으로 활약한 광주서중학생은 40명이었으며 이 40명중에 배양태 , 장영식 등이 있었다.
 
배양태는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교내활동에 적극나섰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선후배와 친구들을 규합해 반공의 기수로 앞장섰다.
 
당시는 극한 이념의 대립기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 하던 공산주의 세력은 거리 벽보와 전단지에 '소련조국만세'라는 문구를 버젖이 사용할 정도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1949년 3월 8일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배양태는 정익성 서중학교장의 지명으로 광주서중 학도호국단장에 임명된다.
 
학도호국단장에 임명된 배양태는 학교와 경찰관서 협력을 받으며 반탁학생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학내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런 활동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정도로 위험했다.
 
배양태와 함께 할동하던 타 학교 학생 중 광주농고 최용호는 남노당측에서 쏜 총을 맞고 겨우 살아나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중학교 6학년 배양태는 서중 학도대장과 학련위원장을 맡으면서 학교 리더가 됐다.
 
6월 25일 북한이 남침했고, 서중학생들은 7월초까지 정상 등교하면서 평안한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7월 17일 광주서중 학도대대장을 맡고 있던 정현성이 학교에 나와 괴뢰군이 장성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광주상업학교 학도대장 정영환(사망)에게 들었다고 전해주었다.
 
전세가 급박한 것을 감지한 배양태를 비롯한 민주진영 학생 50여명은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할 경우 보복에 대비, 광주에서 철수키로 결의한다.
 
이 때 배양태는 남겨지는 민주진영 학생들의 가족을 위해 공산주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3개월후에 북한군은 광주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 학련생들의 가족들을 괴롭힌 자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왔을 때 우리 학련생들의 가족이 무사하다면 너희들의 가족들도 무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3개월 후 광주로 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배양태와 민주진영 학생들이 광주에서 떠난 후 일주일 뒤인 7월 23일께 인민군은 광주를 점령한다.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비극이 벌어진다.
 
공산진영은 남아서 득세를 했지만 평화를 외치던 중도파는 광주에 남았다가 모두 사살을 당한 것.
 
배양태는 7월 19일 광주를 벗어나기 위해 썬그라스에 중절모자를 쓰고 광주역까지 골목골목으로 숨어서 간 후 당시 무안출신 국회의원 장홍엽씨와 함평출신 국회의원 서상규씨 등과 조우, 태극호 2등호를 타고 부산까지 동행했다.
 
부산에 도착한 배양태와 정현성 등은 신문광고를 내고 경남도청 앞으로 광주지역 학도호국단원을 집결시켰다.
 
라디오 알림을 듣거나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온 장영식 감찰부장, 임영득 문화부장, 조귀현 훈련부장 등 50여명의 민주진영 학생들이 모였다.

추후 정익성 교장까지 만나면서 이들은 비분의 눈물을 흘렸다.
 
학생들은 참전을 결의하고 5관구사령부 이응준 소장을 찾아가 총을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이 소장은 학생들을 보면서 “일선으로 보낼 총도 없다.
5관구에는 총이 없다.
하물며 어떻게 너희들에게 총을 줄 수 있겠느냐"고 학생들의 애국심에 눈물을 흘렸다.
 
이 소장은 마산에 주둔하던 미25사단 킹 소장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었다.
 
미25사단은 남해안과 호남지구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25사단에 입대만 하면 고향을 되찾는데 힘을 아낌없이 쏟을 수 있었다.
 
킹 소장을 만난 학생대표 배양태는 "우리들은 군번도 필요없다.
다만 군복과 총만 주면 선봉이 되어 싸우겠다.
그리고 광주를 탈환한 즉시 군을 떠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부대 편입을 간청했다.
 
학생들의 진정성을 확인한 킹 소장은 트럭 3대를 보내어 광주, 전남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학련학생들을 미 25사단에 편입시켰다.
 
학생들은 미군 제25사단 수색중대에 소속됐다.
 
칼빈소총과 M2를 지급받았다.
 
김종곤 소위가 통역장교로 배속되었고, 정진곤 소위, 김남섭 소위 등이 학병들을 입속시켰다.
 
학도병들은 부산 구덕산에서 군사 기초훈련을 받았다.
 
두시간 동안 M1 소총 280발을 쏘는 것이 훈련의 전부였다.
 
학도병은 경남 마산시 현리 최전방에서 괴뢰군들과 대치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속에서 빛났던 학도병들의 투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진격명령이 떨어졌다.
 
학도병들은 현리와 가까운 중리 거주주민들을 모두 피난시키고 결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석양무렵 주민들이 피난가고 없는 중리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수색조 A팀에 속해있던 정현성이 발견했다.
 
배양태는 수색조 B팀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엄폐물을 이용하여 마을까지 접근했다.
 
연기가 올라오는 집을 향해 집중사격했다.
 
이후 그 집을 조사해보니 괴뢰군 세 명이 즉사해 있었다.
 
소련제 권총과 소총을 노획하고 본부로 개선했다.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을 전후해서 더욱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학도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현리와 중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A팀 수색조장인 시네스 상사는 현리 고갯길에서 점심을 먹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중리수색작전에 참여한 김동준이 괴뢰군의 저격을 받아 얼굴, 팔 등에 관통상을 입었다.
 
장영식도 엉덩이에 지뢰 파편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11월 2일 학도병 부대는 진주남강작전에 투입됐다.
 
패해서 도망 가던 괴뢰군들이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남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었다.
 
학도병들은 수색중대의 최선봉을 맡았다.
 
마산을 떠나 진주에 들어가기 전 학도병들은 아군과 적군사이에 끼고 말았다.
 
주위엔 칠흙같은 어둠이 깔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포탄이 비오듯 떨어졌다.
 
배양태는 며칠간의 전투로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고 참호에서 자신도 모르게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10m 앞에 포탄을 맞고 즉사한 미군 시체가 보였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킹 소장까지 부상을 입었을 정도다.
 
이삼일간 전투를 더 이어가면서 적을 섬멸했고,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10월초 전남 남원으로 진격했다.
 
남원에선 괴뢰군의 포로가 되었던 미군 30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괴로군의 야전병원을 접수했다.
 
급히 도주하느라 방치한 부상병들의 살 썩는 냄새가 병원에 진동했다.
 
곧바로 곡성을 접수했다.
 
광주가 지척인 곡성에서 부대를 집결시킨 미군은 곧 광주탈환 작전을 수립한다.
 
광주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도병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고향을 수복하는구나"
 
일부 학도병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을 밟고 싶다는 욕심에 광주 인근을 왔다갔다하는 군통신차량에 탑승하기를 원했다.
 
광주로 떠난다는 군통신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이 이어졌다.

승차인원이 1명이어서 결국 전원 탑승에서 배제됐다.
 
광주로 떠난 군통신차는 괴로군의 집중포격을 받고 박살이 났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운전병이 비보를 전했다.
 
광주탈환 작전이 시작됐고, 학도병들은 경찰 병력과 합세해 진격했다.
 
10월 3일께 배양태와 장현성 등 학도병들은 마침내 광주에 입성한다.
 
고향땅을 밟은 학도병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광주 수복 후 지리를 잘알고 있는 이들은 잔당 소탕작전에 투입된다.
 
전담 담양군 용면 추월산에 숨어 있던 적은 월동준비를 위해 광주근교까지 습격해오곤 했다.
 
학도병들은 경찰과 함께 이들을 깡그리 소탕했다.
 
광주의 치안이 확보되자 입대 전 약속처럼 학도병들은 군을 제대, 학생 신분으로 돌아갔다.
 
광주를 떠난 후 다시 돌아올때까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던 학도병들의 희생은 컸다.
 
진주남강전투에선 며칠간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퍼붓는 포탄속에 많은 동지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남강의 물은 이들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귀를 찢는 총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광주까지 진격이 이어졌지만 자신과 함께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의 얼굴은 하나둘씩 사라지는 슬픔을 겪었다.
 
한번은 배양태가 타기로 되어있던 트럭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자리가 없자, 다음 트럭을 타기로 하고 먼저 탄 친구에게 자신의 가방을 주면서 어머니께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 트럭은 전남 곡성에서 인민군의 습격으로 전부 몰살당하고 가방도 트럭과 함께 불타버렸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배양태가 전사한 줄 알게된다.
그러나 며칠후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련동료들이 마을어귀에 ‘배양태, 장영식 전쟁에서 살아오다’ 라는 현수막을 걸고 귀환을 축하했다.
 
학도병을 제대한 후 경찰에 투신, 빨치산 소탕에 나서
 
광주가 수복되었지만 아직 한국전쟁이 한창이어서 학교는 개강하지 못했다.
 
배양태와 장영식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경찰에 특채된다.
 
당시 광주 및 광산군 등에 공산군의 잔당이 남아 있어서 토벌 할 인력이 부족하던 때였다.
 
배양태는 심상준(당시 전남 경찰국장 아들)과 같이 활동을 했다.
 
심상준은 경찰국장 수행경찰이 되고 배양태와 장영식은 전라남도경찰국정보과 특수분실에배치되었다.
 
배양태와 장영식은 학생들 중에서 입산한 사람들을 토벌하러 다녔다.
 
광산군 평동면에 부역자와 후퇴를 못한 잔당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잡듯이 수색해 일망타진하는 실적을 올렸다.
 
함께 참전했던 학도병들은 의용경찰, 보조경찰이되어 함께 활동했다.
 
이후 개학하자 재입학을 위해 사표를 내고 정보원이란 증명을 가지고 다니면서 반공활동을 했다.
 
배양태는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왔지만 수십년간 꿈속에서 인민군의 총탄에 죽어간 동지들의 비명소리가 나타나는 등 심적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산진영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에게 증오심이나 적개심은 품지 않았다.
 
의리와 생명을 중시하던 배양태는 공산진영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에게 관용과 아량으로 대하는 대범함을 보여줬다.
 
공산진영에서 활동하던 학생들을 잡더라도 처벌보다는 사상전환의 기회를 주어 목숨을 구할수 있도록 선처했고, 이중에는 이후 유명인사로 성장한 사람이 여럿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한 광주와 전남 지역 학련 학생들과 전쟁에서 전사한 학생들의 숫자는 262명이다.
 
시대의 비극속에 10대의 아까운 나이에 죽어간 청년들을 위해 광주어린이대공원에 위령탑이 세워졌고 매년 위령제가 올려진다.



<고 배양태 박사와 광주지역 학도병들을 조명한 전남지역 지방일간지의 기사>
 
전쟁 이후 의사로서 활발한 사회봉사의 삶을 살다
 
진로를 고민하던 배양태는 적성에 맞지 않던 경찰을 퇴직한 후 학업에 전념했다.
 
그는 부산 피난 시절부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들을 치료해 살려내는 의사의 소중함을 동경했다.
 
그는 시험을 6개월 앞두고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해 두문불출 공부만 전념, 결국 전남대학교 의대에 합격한다.
 
이후 계속 공부해 외과전문의와 의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서울 강남에 병원을 개업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배양태 박사는 국제라이온스 총재, 대한의사협회 의정회장까지 역임한다.
 
함께 학교를 다녔고 전쟁에서 싸웠던 장영식은 서울대학교 공과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는 한 대학교에서 수리경제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한국전력 사장에 발탁된다.
 
당시 한국전쟁에서 학도병으로 함께 피를 흘렸던 친구와 선후배들은 모두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심세대로 성장,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청춘과 목숨을 초개처럼 바쳤던 이들의 애국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고, 세계경제 11위의 부유함은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간혹 요즘 젊은 세대들은 촌로가 되어버리거나 삶을 마감한 전쟁 세대들을 비민주적, 권위적이라고 맹렬히 비판하곤 한다.
 
고 배양태 박사와 함께 공산주의를 상대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10대의 학도병들이 그 젊은 나이로 되살아나 자신들을 비난하는 국민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이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요즘 세대들에게 이렇게 되물어보지 않을까?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자신을 희생했기에, 비겁하게 달아나지 않았기에, 그래서 너희들은 그 피로 얻은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다시 전쟁이 난다면 너희 젊은이들은 70년 전 그때 나처럼 조국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총을 들고 최전선으로 돌격할 용기와 신념이 있는가?"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3사단장으로 참전해 1955년 서울 흑석동에 있는 '학도의용병 현충비'를 세우는데 앞장 섰던 김석원 선생의 회고록 '노병의 한(1977)'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국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조국을 구하기 위해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는 것은 애국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애국이며 인간의 행동치고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고 나는 언제나 확신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군번도 없이, 명예도 없이, 훈장도 없이, 어떤 댓가도 없이,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학도병들의 명복을 빌고, 후손들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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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호 기자 seoul55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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